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괌 전투 (문단 편집) === 내륙으로의 공세 (7.23~8.10) === 미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22일 하루동안 일본군의 추가방어선을 돌파하고 사단포병 등 중화기를 대거 양륙했으며 예비인 육군 77사단까지 23일에 상륙을 시작했다. 7월 24일에는 양 교두보의 병력이 연결되었고, 괌 섬의 서해안 중남부에 위치한 오르테 반도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오르테 반도에는 일본 해군 중심으로 2천여 명의 병력이 있었고, 이들은 늘 그렇듯 25일 밤에서 26일 새벽에 반자이 어택을 가했으나 당연히 실패했고, 같은 시기에 일본군이 후방 병력까지 긁어모아 아삿 교두보에서도 역시 반자이 어택을 했으나 병력만 잃고 실패, 장교진 대부분을 잃고 이후 장기 소모전으로 전술을 변경한다. 해병 1여단은 26일부터 오르테 반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오르테 반도는 비교적 고지에 있어서 방어에 용이하고, 항구(아프라 항)이 있어 물자 하역이 용이하며 아갓 및 아삿 두 교두보를 감제할 수 있어 전술적으로 중요했을 뿐더러, [[제1차 괌 전투]]때까지 괌 주둔 해병대의 기지가 있었기에 해병대로서는 기필코 탈환해야 한다는 상징성까지 있었다. 미군은 작전 계획에 의거, 아프라 항과 일본군 비행장[* 이 비행장은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 위성 사진에서도 활주로의 흔적을 볼 수 있고,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이 건설되어 있어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오르테 반도에 정면으로 진입하기보단 아갓 만과 아산 해변에 우회 상륙한 후 재빨리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오르테 반도를 탈환할 계획이었다. 허를 찔린 일본군은 오르테 반도로 들어오는 입구에 벙커와 참호, 기관총, 철조망으로 구성된 방어망을 형성하여 미군의 공세를 지연시켰으나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방어선에 막힌 해병대는 전차를 불러와서 벙커 하나하나, 기관총 진지 하나하나 모조리 때려부수며 천천히 진격했다. 결국 오르테 반도는 7월 29일 '''탈환'''되었고 같은 날 오르테 반도 국기게양식에는 전선의 주요 지휘관은 물론 미 해군[[대장(계급)|대장]]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까지 참석하여 그 상징성을 더했다. 7월 30일까지 오르테 반도를 포함함 섬 남부를 점령한 미군은 31일부터 섬 북부로 공세를 단행했다. 7월 31일, 수도 아가나를 점령했고, 8월 2일에는 77사단이 괌 중부에서 북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 바리가다(Barrigada)를 함락시켰다. 일본군은 상륙 초기 쓸데없는 야습으로 병력을 죄다 소진(...)하는 바람에 미군의 본격적인 내륙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특히 바리가다를 점령할 때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77사단은 매복하고 있다가 발각된 일본군 전차 한대가 전선을 이리저리 헤집다가 무사히 퇴각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여러 실수를 저지르면서 그 날 하루에 120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우왕좌왕했으나, 이미 주력 방어군이 분쇄당한 일본군은 이런 기회를 살려 반격을 가하기는 커녕 바리가다에서 저항을 더 지속하지도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8월 7일에는 섬 최북단에서 10km정도밖에 안떨어진 이고(Yigo)까지 빼앗겼다. 이때부터는 [[사이판 전투]] 종료 후 사이판 기지에 전개한 육군항공대 [[B-25]] 폭격기까지 항공지원에 나섰다. 8월 10일, 태평양함대사령관 니미츠 제독이 괌을 방문으로, 정식으로 괌 탈환 및 괌 전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다만, 수뇌부 중심의 일본군 최후의 잔당들은 북부 산 일부의 동굴진지에서 11일 아침까지 저항하다 전멸했다. 여기서 31군 사령관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 등이 전사했다. 그 이전 사이판 전투에서 31군 참모장 및 사령부 참모들이 대거 전사 내지 할복했기 때문에 31군은 사령부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31군 작전지역이 마리아나와 캐롤라인 제도 동부였고, 이후 31군 작전지역에는 미군과의 대규모 상륙전이 없었으므로 나머지 반수 정도가 온존한 채로 종전을 맞게 되기는 했다. 작전 지휘가 이유라고는 해도 31군이나 제1항모기동부대 등이 아직 조직이 충분히 남아있었는데도 오바타나 나구모같은 사령관들이 전투직전 사지로 굴러들어갔다 죽었다는데서 마리아나 전역에서 일본군의 다급함과 무모함이 크게 드러났다고 하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